이건 제가 쓴 글은 아니구요, 지금 바꿈에서 청년네트워크 활동하고 있는 정두호님의 글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두 명이 있었다. 스물의 그들은 몰랐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나타나는 차별들에 점점 숨을 가빠했다. 여성의 역할을 요구했고 여성으로 살아가길 강요받았다. 그들이 느낀 주변의 눈빛은 이마트에 높이 쌓인 예쁘장한 인형들을 고를 때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상자 안에 담겨 비닐 시트지 너머의 자신들을 고르고 있는 행복해 하는 눈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물의 나에게 ‘너의 눈빛도 똑같다’고 말했다. 나는 듣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몸서리치게 노력한 스무 해 남짓한 나의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을 삐딱하게도 바라보고 공부도 열심히 해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의 눈빛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해주었다.
공부도 정치도 지쳤을 때쯤 문득 그들이 나에게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내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은 그들을 위아래로 쳐다보고 난 뒤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묻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다니고 있는 나의 자격과 능력을. 그런 시선에 나도 그 사람을 쳐다보면 시선을 피한다. 나의 눈빛은 맞받아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날 바라보고 있는 너와 같은 눈빛이니까.
주변은 나에게 물었다. 그들이 너와 연인 관계냐고. 친구 관계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느냐고. 주변은 그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인형들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하나씩,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단지 나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나는 불편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깨달았다. 주변이 했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생각하고 했던 말들이었음을. 산더미 같이 쌓인 인형들을 웃으며 고르고 있는, 시트지에 뿌옇게 입김이 서릴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바라보던 사람이 나였음을.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상자로 들어갔다.
비로소 나는 그들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차별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현실에 함께 슬퍼할 수 있었으며 서로가 서로의 지지대가 되었다. 물론 나의 삶은 예전보다 훨씬 불편하고 스스로에게 더 많은 고민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끔찍한 상황에서 단순히 도망가는 것이 아닌 올바른 행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일수도 있고 불필요한 싸움일 수도 있다. 내가 가진 것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항상 힘들고 고민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었으며,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인간답다는 것은 인간의 목적과 그 기능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을 왜 감수해야 하냐고, 내가 가진 권력을 놓기 싫다고, 내가 가진 것들을 왜 누리지 못해야 하냐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고 싶다면 인간이길 그만두시라. 인간다움의 첫 단추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어렵다고 느껴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그들과 얘기하고 함께 하시라.